원자를 쌓는 순서만 바꿨는데 반도체가 달라졌다…한국 연구팀 ‘선택적 원자 기울기’
안병훈 기자
원자 하나 더하지 않고 물성을 바꾼다고?
새로운 원소를 섞지도, 화학 조성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금속은 더 똑똑해졌고, 절연막은 더 얇으면서도 더 강해졌다.
믿기 어려운 이 결과를 만들어낸 비밀은 다름 아닌 ‘순서’였다. 원자를 쌓는 순서를 바꾼 것만으로 재료의 기능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국내 연구진의 성과가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리면서 반도체·센서 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포스텍·숭실대 공동연구팀, ‘선택적 원자 기울기’ 전략 제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대수·이길호·최시영 포항공과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와 박세영 숭실대학교 교수 공동 연구팀이 원자층 조성 배열을 정밀하게 설계해 금속과 초박막 절연재료에 새로운 기능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2일 밝혔다. 연구팀은 재료의 핵심 성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크기가 다른 원자의 비율을 두께 방향으로 서서히 바꿔가는 ‘선택적 원자 기울기(Selective Atomic Gradient)’ 설계법을 고안했다.
한쪽에는 큰 원자를, 반대쪽으로 갈수록 작은 원자 비율을 높여 층층이 쌓자 재료 내부 구조가 위치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했고, 이 과정에서 원자들이 미세하게 한 방향으로 치우치며 ‘극성’이 생겨났다. 흥미로운 점은 원자층 배열 순서를 뒤집으면 극성 방향도 그대로 반전됐다는 사실이다. 반면 동일한 원자를 층별 구분 없이 고르게 섞은 경우에는 이런 방향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즉, 원소의 종류와 양뿐 아니라 ‘쌓는 순서’ 자체가 재료의 기능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실증된 셈이다.
금속은 방향성을, 절연막은 ‘얇으면서도 강하게’
연구팀은 전기가 잘 흐르는 (Sr,Ca)IrO₃ 박막에 이 방법을 적용했다. 그 결과 기존의 금속성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전류 방향에 따라 저항이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원자층 배열을 반대로 하면 저항 차이의 방향도 함께 뒤집혔다.
제조 단계에서부터 전기적 방향성을 설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더 주목할 성과는 두께 약 5.1nm에 불과한 (Ba,Ca)TiO₃ 초박막 절연재료에서 나왔다. 선택적 원자 기울기를 적용하자 막을 통과해 새어 나가는 전류는 크게 줄어들었음에도 전기 에너지 저장 능력은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특히 작은 온도 변화를 전기 신호로 바꾸는 성능은 비슷한 두께의 기존 비교군보다 약 100배나 높게 측정됐다. 이 역시 원자층 배열을 반대로 하면 신호 방향이 함께 반전되는 일관된 패턴을 보였다.
스핀트로닉스부터 열 센서까지, 확장성에 거는 기대
연구팀은 금속에서 구현한 전기적 방향성이 방향성 전자소자와 스핀트로닉스 분야에, 초박막 절연재료의 낮은 누설전류와 높은 저장 성능은 차세대 반도체용 초박막 절연막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향상된 온도 감지 성능 역시 적외선·열 센서나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로 이어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연구를 총괄한 이대수 교수는 “새로운 원소를 더하지 않고도 원자를 쌓는 순서만 바꿔 재료의 원래 장점은 살리면서 새로운 기능을 더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며 “앞으로 자성체와 초전도체 등 더 다양한 물질로 확장하고, 실제 소자로 구현하는 후속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성수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도 “기초연구가 소재 설계의 새로운 해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며 지원 의지를 밝혔다.
기초 연구가 우리 삶에 닿는 과정
이런 연구 성과는 대개 수년의 시간을 거쳐 제품에 반영됩니다. 오늘의 실험실 결과가 몇 년 뒤 스마트폰의 배터리 시간을 늘리고 기기의 두께를 줄이는 바탕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이는 연구가 결국 일상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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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용어가 나와도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운 방법으로 더 얇고 더 강한 재료를 만들었다는 한 문장만 기억해도 충분합니다. 과학 뉴스는 이해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기자의 생각
이번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을 넣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쌓느냐’로 물성을 제어했다는 발상의 전환에 있다. 반도체 미세화가 물리적 한계에 다가서면서 업계는 새로운 소재보다 기존 소재를 더 정교하게 배열하는 방식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이번 성과는 그 가능성을 구체적 수치로 증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실험실 수준의 성공이 실제 반도체 공정과 센서 양산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재현성과 대량생산 적합성 검증이라는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럼에도 ‘순서’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변수를 찾아낸 이번 연구는, 향후 자성체·초전도체 연구로 확장될 경우 국내 기초과학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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