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극장가에 개봉한 한국영화는 나홍진 감독의 ‘호프’ 단 1편뿐이었다. 영화계 최대 성수기로 꼽히는 7~8월에 한국영화가 한 편밖에 걸리지 않은 건 코로나 시기에도 없던 일이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마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와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였고, 이 세 편이 끌어모은 관객 수만 약 1800만명에 달했다.
배급사들이 통째로 백기를 든 이유
‘호프’는 한국영화 역대 최대 제작비인 약 500억원이 투입된 작품이다. 여기에 할리우드 대작 두 편이 일찌감치 여름 개봉을 확정해두면서, 국내 배급사들은 진작에 여름 시장 자체를 포기하고 하반기로 개봉을 미뤘다. 결과적으로 여름 한 철을 외화 세 편에 완전히 내준 셈이다.
추석 앞두고 한꺼번에 몰린 6편
9월 들어 스파이더맨과 오디세이의 흥행세가 한풀 꺾이고 박스오피스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동안 대기하던 한국영화들이 일제히 개봉을 확정했다. 추석 연휴까지 낀 이번 9월에는 세계적 거장의 신작부터 인기 웹툰 원작 액션물까지 총 6편이 한 달 안에 줄줄이 스크린에 걸린다. 대표적으로 백종열 감독이 연출하고 구교환이 주연한 웹툰 원작 액션 판타지가 눈에 띈다. 죽었다 72시간 만에 부활하는 능력을 갖게 된 취준생이 의문의 추격을 당하는 설정으로, 구교환은 이번 작품에서 붉은 머리로 비주얼 변신은 물론 첫 본격 액션 연기에 도전한다.
같은 극장, 같은 관객을 두고 벌이는 ‘제로섬 전쟁’
문제는 6편이 동시에 몰리면서 관객 수 자체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장을 찾는 사람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작품 수만 늘어나면, 결국 누군가는 스크린 수 확보 경쟁에서 밀려나고 누군가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다. 업계에서 “9월엔 누군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기자의 시각: ‘몰아치기 개봉’이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
이번 사례에서 짚어볼 지점은, 이게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매년 반복되는 한국 영화계의 구조적 패턴이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대작이 여름 성수기를 선점하면 국내 배급사들이 줄줄이 하반기로 밀리고, 그렇게 밀린 작품들이 추석이나 연말 같은 특정 시기에 다시 한꺼번에 몰리는 악순환이다. 결과적으로 정작 여름엔 볼 만한 한국영화가 없고, 9월엔 너무 많아서 못 고르는 기형적인 배급 구조가 매년 되풀이되는 셈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갑자기 쏟아지는 게 반가울 수 있지만, 정작 좋은 작품이 스크린 수 부족으로 조기 종영되는 부작용도 함께 따라온다. 이번 9월, 어떤 작품이 살아남고 어떤 작품이 조용히 묻힐지가 올 하반기 한국 영화계의 체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